작성일
2025.04.29
수정일
2025.04.29
작성자
나노
조회수
4

[과학에세이] 시민혁명은 음의 절대온도

물의 어는점을 0도로 정한 섭씨온도에 익숙하기에 예민한 사람은 몸의 감각으로도 영하의 온도를 맞추곤 한다. 온도에 따라 풍선이 부풀거나 쪼그라들 듯 ‘샤를의 법칙’은 일정 압력 아래의 기체 부피 변화가 온도에 비례함을 알려준다. 이를테면 동네를 뛰어다니는 아이들은 넓은 공간을 점유하지만, 어르신들은 한곳에 모여서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이치와 같다. 열은 물질을 구성하는 원자나 분자들의 에너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온도를 계속해서 낮춘다면 결국에는 열을 전혀 지니지 않는 상태에 도달한다는 추론이 가능하며, 대략 영하 273도 근처의 이 지점을 절대온도 0K(켈빈)로 삼는다고 배운다. 그래서 0K에서는 물질의 에너지도 0이고 음의 절대온도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양자물리와 통계물리를 모른다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양자물리는 텅빈 진공조차 에너지가 있다고 말한다. 하물며 원자들로 채워진 물질이 0K에서 에너지가 없을 리 없다. 대신 0K에서의 에너지는 열과 구분되는 양자적 불확실성의 결과다. 그렇게 액체 헬륨은 0K에서도 생명체처럼 바닥과 벽을 타고 기어갈 수 있으며, 고체 속 전자들 역시 0K에서 운동에너지를 지닌다. 이 낯선 상황을 이해하려면 열과 온도를 동일시하는 관점에서 벗어나야 한다. 온도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필요하다.

통계물리의 온도는 에너지 변화에 따른 집단의 정렬 정도를 대변한다. 이를테면 집단의 구성원은 권력의 명령(order)으로 정렬될(ordered) 수 있지만 개인의 의지에 따라 ‘복종’과 ‘저항’을 선택할 수도 있다. 합리적 판단을 보류한 수동적 ‘복종’이 음의 에너지를 가지는 것에 반해, 두려움에 맞선 능동적 ‘저항’은 양의 에너지를 지닌다. 뜨거운 가슴에서 비롯된 ‘저항’의 에너지는 ‘열’이라는 단어로 바꿔도 무방하다. 개인이 선택한 ‘복종’과 ‘저항’의 에너지를 모두 합치면 집단의 총에너지가 된다. 가령, 막 입소한 신병이나 수감자 집단의 총에너지는 모두가 ‘복종’하는 가장 낮은 음수값을 지니고, ‘복종’과 ‘저항’이 양분된 집단의 총에너지는 0이다.

이제 똑같은 총에너지를 만들어 낼 다양한 경우의 수를 고려해 보자. 모두가 ‘복종’하는 경우의 수는 단 한 가지뿐이다. 그러나 배신자가 되지 않기 위한 침묵의 ‘복종’을 거부하는 한 사람이 등장하는 경우는 구성원 수(N)만큼 많다. N명의 구성원 중에서 2명이 ‘저항’하는 경우의 수부터는 조합(NC2)의 개념을 알아야 한다. 이를테면 철수와 상욱, 상욱과 예지, 철수와 예지, 혹은 당신과 나 같은 다양한 짝의 조합이 가능하다. ‘저항’의 인원이 증가할수록 경우의 수도 증가해 구성원의 절반이 ‘저항’하는 지점에서 최대가 된다.

통계적 절대온도는 총에너지의 증가, 그러니까 ‘저항’ 인원수 증가에 따른 경우의 수 변화의 가파름에 주목한다. 가파름이 크면 온도가 낮다. 모두가 ‘복종’하는 한 가지에서 한두 명이 ‘저항’하는 여러 가지 경우의 수는 급격한 증가다. 따라서, 전원 ‘복종’의 정렬에서 이탈한 대담한 소수는 주목을 받을 수 있으며 이 집단의 온도는 낮다. 반면 이미 많은 이가 ‘저항’에 동참한 상황에서 한두 명이 더해진 경우의 수 증가는 상대적으로 작다. 따라서 정렬도가 낮아진 이 집단은 온도가 높다. 의견이 50대 50으로 양분된 집단에선 누구도 개인의 의견에 주목하지 않는다. 따라서 경우의 수 변화가 없는 ∞K다. 모두가 ‘복종’하는 차가운 독재사회에서 ∞K의 혼돈 상태로 갈수록 경우의 수 경사는 완만해지다 최고점에 도달해 평평해진다.

‘저항’의 인원이 절반을 넘긴 상황은 어떨까? ‘저항’의 일치된 의견이 점차 증가하며 경우의 수는 줄어든다. 전원 ‘복종’에서 절반의 ‘저항’을 향하며 증가하던 경우의 수 모습과 대칭을 이룬다. 즉, 경우의 수 기울기가 음(-)이다. 그러므로 시민혁명은 음의 절대온도에서 일어나며 오히려 양의 절대온도보다 더 큰 에너지가 필요하다. 시위를 지속하는 피로감과 개인적 일상의 희생도 감수해야 한다. 이렇게 권력의 부당한 명령에 맞선 시민의 반(反)정렬로 지혜로운 시민사회는 폭력 없이도 독재정권을 무너뜨린다. 우리는 지금 그 일을 해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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